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문단 편집) === 배경 === 아나톨리아 고원은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셀주크 제국]]등 거대한 제국이 부딪치는 험지로, 일찍이 3~4세기 경 나라를 잃은 아르메니아인 귀족들은 페르시아와 로마 양쪽에 흩어져 살며 힘의 균형이 변할 때마다 중간지대에서 나라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들에게 로마노프 러시아의 확장 정책은 페르시아계 칸국의 자리에 아르메니아인의 독립국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1세의 국가 운영 정책은 "Orthodoxy, Autocracy, and Nationality"[[https://en.wikipedia.org/wiki/Orthodoxy,_Autocracy,_and_Nationality|#]]로, 이를 제국 운영 실태와 종합하면 이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거부하는 루스 정교도의 내셔널리즘에 가까웠다. 어쨌든 이 점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이슬람 제국을 벗어나고 싶은 소수민족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러시아는 캅카스를 정벌하기로 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캅카스로의 확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표트르 대제의 1682~1725년, 예카테리나 2세의 1762~1796년, 파벨 1세의 1796~1801년, 알렉산드르 1세의 1801~1825년에 걸쳐 러시아의 캅카스 영토는 차츰 넓어져 갔고 최종적으로 아할치헤(오늘날의 조지아), 카르스, 에르제룸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최후의 경합을 벌인다. 1829년 아드리아노폴 조약으로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이 때 동유럽에서 격변이 일어난 것에 비하면 그리 큰 일은 아니나, 캅카스에서도 약간의 변동이 일어난다. 오스만 제국은 예레반 칸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영유하던 아할치헤와 카르스에 대한 러시아의 접근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오스만 치하에 남은 에르제룸과 러시아에 복속된 아할치헤, 카르스는 상호 추방을 통해 민족 교환을 한다. 이 과정에서 튀르크 출신 아르메니아인들이 조지아인의 산악 요새인 아할치헤에 다수 흘러들어가는데, 이는 100년 뒤 아르메니아가 조지아와 영토 분쟁을 벌이는 씨앗이 된다. 1828년 2월 21일 체결된 투르크멘차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페르시아와의 국경 협정도 매듭을 짓는다. 아라스 강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하여 오늘날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국경이 이 때 정해진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끝으로 획득한 지역의 권역을 재조정해 주(Oblast)를 설치하고 통치한다. 러시아는 예레반 칸국과 나히체반 칸국을 병합해 아르메니아 주를 설치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한다. 이 당시 아르메니아 주의 영토는 꽤나 그럴싸한 자연국경으로, 예레반과 아라스 계곡의 비옥한 저지대를 영유하면서 캅카스 동서를 잇는 괜찮은 관문주로 그 영향력이 조금 커진다. 하지만 예레반 시에 2만 명 정도 사는 아르메니아인을 제외하면 그 바깥 권역에서 그들이 압도적인 소수민족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카르스 등지에서 몰려든 이민자들 덕분에 예레반 칸국에서도 소수민족이었던 아르메니아인은 마침내 이 권역에서 인구 과반을 차지하는데, 한편으로 예레반 시 권역 밖에서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민족 비중이 30%를 넘지 못했으며 이들은 거의 전부 이민자였다. 아르메니아의 입장에서는 5세기 이전 훼손된 기독교인의 땅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기뻐했겠으나, 최소 4세기부터 정주하던 페르시아계 튀르크인들과 칸국의 국경 따위에 관심이 없던 북페르시아 유목민들에게는 무슬림 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엘리트들은 러시아에 충성해 척식사업에 앞장서고 특혜를 받았으나, 내치가 안정된 1840년 니콜라이 1세는 캅카스의 유력 종교인과 정치인들을 모두 추방하기로 한다. 또한 1880년대까지의 행정구역 재편을 통해 아르메니아주가 병합을 원하던 서부권역은 카르스로, 북부권역은 티폴리스로, 동부권역은 엘리자베트폴로 병합하여 단순화하고 주 체제에서 총독부 체제로 통치 방침을 바꾼다. 차르를 외교로 구워삶아 대아르메니아주의를 구현하려던 엘리트들의 꿈은 무너진다. 러시아 제정은 역사적으로 속령들의 민족주의를 싫어하였고, 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협력할 때부터 우려하였던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되었든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주(Armyanskaya oblast)에서 예레반 주(Erevan guberniia)로 민족 명칭까지 뜯기고[* 애초에 조지아인과 타타르인에게는 이런 특혜가 주어지지도 않았었다. 형평성을 맞춘 것.] 러시아화를 맞이한다. 191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예레반주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669,000명으로 지역 인구의 60%를 차지했으며 카르스, 티플리스, 엘리자베트폴, 바쿠에는 각각 119,000명(30%), 415,000명(28%), 419,000명(33%), 120,000명(9%)의 아르메니아인이 더 있었다. 예레반주는 전체 1,738,000명의 러시아 소속 아르메니아인 중 37%인 669,000명만을 담을 수 있었으니, 1840년대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권역 설정에 불만을 갖고 여러 차례 제국에 진정을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애초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주 편성을 배제하고 모두 러시아화를 원했던 제국에게 이러한 이의는 심기를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인구 비율에서도 알 수 있듯 1917년 당시 750만명이 살던 캅카스 전지역에 30% 이하의 비율로 엷게 흩뿌려져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곳을 모두 아르메니아의 속령으로 인정한다면 판도가 아주 더러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나머지 70% 주민의 반란을 감당할 수 있는지 또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계의 불만의 일례로 이들은 아직 제정 치하인 1880년 [[트빌리시|티폴리스]]에서 [[아르메니아 혁명연맹]](Armenian Revolutionary Federation)이라는 [[사회민주주의]] 기반의 결사단체를 결성해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불문하고 양쪽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란을 사주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이들에게 아르메니아 교회의 자산을 차르 아래 둘 것과 복종을 명령하는 한편 아르메니아 교육 기관들을 폐지하고 러시아식 교육 보급에 박차를 가한다. 아르메니아 혁명연맹은 진압에 반발하며 이후 2년간 백 단위의 러시아 관료들에 대한 암살 등 테러를 집행하여 제정 말기 러시아의 혼란에 기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